날 무시했던 재능충 후배를 3년 뒤에 찾아갔더니……

감히 기억 안나는 척을 한다고!?


길드에서 사라졌던 후배
젠셴을 찾아 깊은 숲으로 들어간 쿠레나이.
이 오만하고 버릇없던 남자와 다시 만난 그녀는
과거의 감정과 미묘한 긴장 속에서 엉켜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마주한다.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쉽게 놓지 못하는 두 사람.
도발과 진심 사이, 외면과 집착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뒤섞인 감정들이 폭발하며
쿠레나이와 젠셴의 왜곡된 화살은 다시금 서로를 향한다.



캐릭터 소개


나이26세 남성특기분야궁술, 섹스
신장182 cm좋아하는 것가벼운 관계(라고 생각했다), 섹스, 우위에 있는 것, 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과일, 연상
직업퇴역 장궁병, 대상인 가문의 3남매 중 둘째거북한 것진지한 것, 집착(이라고 생각했다2), 책임감, 더러운 침구

적사항

본명은 젠셴 자크(Gentian Zak), 가문이 엮이면 귀찮아진다는 등의 이유로 별명으로 통성명하는편이다. 오만하고 장난스럽고, 언제나 상대보다 위에 서려는 경향이 강한 떠돌이 장궁병. 외향적이지만 인간관계는 가볍고 문란하며, 여유 있는 척하면서도 내면에는 인정 욕구와 불안이 공존한다.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책임감 강한 형을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부담으로 여기고, 소심하고 자존감 낮은 여동생은 애정을 담아 귀여워한다. 그는 연애와 육체적 관계에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며,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많은 경험을 쌓아왔다.

대상인 가문의 3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가문을 이어받을 뛰어난 형이 있었기에 집안으로부터 특별한 기대나 의무를 요구받지 않았다. 덕분에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동시에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이 어린 시절 내내 깔려 있었다.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날 무렵, 타고난 활 솜씨를 인정받으며 장궁병으로 입대했으나 자유롭던 성격이 절제된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년 만에 퇴역한다. 이후 용병 길드에 들어가 쿠레나이를 만난다. 뛰어난 솜씨를 알아본 갠쥐는 그녀에게서 좀 더 고도화 된 장궁술을 가르침 받게 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모난 부분으로 인해 갈등을 빚어 이러한 길드 생활 마저도 오래 가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과 “그렇게 되는 건 곧 얽매임이자 귀찮음”이라는 모순된 생각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3년 전 길드 탈퇴로 헤어졌던 쿠레나이와 재회하게 된다. 그녀와 진심을 나누고 오해를 푼 현재는 그녀와 함께 가끔 집안의 재력을 빌리면서도 자유롭게 여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레나이 로즈

나이28세 여성특기분야궁술, 채찍질, BDSM
신장151 cm좋아하는 것박하 사탕, 미래에 대한 비전, 칭찬, 자기 계발
직업용병 마법사 (전 장궁병 길드마스터)거북한 것예의 없는 것, 아빠, 남자, 사교계 지인들, 마법학회 소속 마법사들, 어린애 취급

적사항

대륙을 떠돌아 다니는 흑마법사 아가씨. 정치인 가문의 외동딸이지만 강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특유의 당찬 카리스마로 과거 궁수 용병 길드를 운영했지만, 재능 넘치는 신입 제자로 인해 크게 좌절하고 마법사로 전향한다. 이 과정에서 이계의 존재와 계약을 맺기 위해 왼쪽 눈을 희생했다. 타인을 통제하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나 본인에게 면역은 없다. 도발에 잘 넘어가는 다혈질에다 악인성향이지만 진중한 노력파. 자존심은 있을지언정 결코 자신의 위치를 부풀리지 않으며 오만하지 않다. 곱상한? 얼굴에 비해 말투가 상당히 거칠다. 삼단으로 늘어나는 완드를 통해 거대한 촉수들을 소환하고 상대를 묶거나, 때리거나, 유린하는 것에 능통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은 본인에게 있는 어떠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발현된 버릇같은 것이다.

7세~24세 : 아버지에게 성추행 및 가스라이팅을 당해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부끄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고, 실력과 권력에 집착하게된다. 정치 판에서 뛰쳐나와 여행하면서 궁술을 갈고 닦았으며, 그녀의 소문을 듣고온 모험가들에게 궁술을 가르쳐주면서 (그녀 자신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용병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초기의 장궁병 길드이다.25세: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내 길드마스터로서의 입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쿠레나이가 25살이 될 무렵 태도가 건방진 신입이 들어오게 되고, 그 신입에게 장궁술을 가르치면서 쿠레나이는 이 청년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청년의 불량한 태도와 더불어 자존심이 상했던 쿠레나이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실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길드마스터 자리를 하차, 길드도 깔끔히 탈퇴한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새롭게 마법사의 길로 들어선 쿠레나이는 이 길이 자신과 꽤 잘맞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마법 학회가 금지한 흑마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학회 소속 마법사들과 대립, 그들과 물리적으로도 이런저런 갈등을 빚었기에 그들을 피곤한 꼰대라고 부르면서 싫어하는 것은 덤이다.

3년 후 자신과 갈등을 빚었던 청년의 소문을 듣는다. 길드마스터가 길드를 그만두자 그 청년도 얼마 안되어서 길드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쿠레나이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한편으로는 그가 왜 길드를 그만두었는지 이유를 궁금해하며 조용히 그의 흔적을 좇는다. 마을 외곽 숲에서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털어 놓게된다. 오해가 풀린 현재는 주인과 하인 역할(?)을 자처하며 함께 여행하고 있다.

긋난 화살촉

ⓒ 머쉬

울창한 숲에 이따금 새어들던 햇볕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쿠레나이는 그림자를 짓밟고 적막을 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헛걸음만 벌써 수십 번째인 탓에 그녀는 다소 지쳐 있었다. 그러나 기어코 그 사내와 닮은 외양의 여행자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증언을 한 자가 몇 번이고 확신했으므로, 숲의 한가운데를 지나도록 인적이라곤 없었음에도 쿠레나이는 그 말을 믿고 나아가야 했다. 아파 오는 발을 무시하고 그녀는 끈질기게 걸었다. 가까워 오는 저녁 특유의 서늘하고 조금 습한 공기가 팔에 자꾸 달라붙어서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묘한 소리를 들었다. 쇠나 나무 같은 것을 문지르는 듯한 소리였다. 사람인가? 호기심이 일었다. 그 소리의 정체가 사람이라면, 그녀가 목표로 한 남자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말을 물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바람을 타고 넘어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재개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소리를 낸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삭아 가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느긋한 손짓으로 활시위를 매만지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금빛 장궁은 사용한 지 오래된 듯 여기저기 흠집이 있었다. 노랗게 뜬 그의 눈빛이 이따금 그의 무기를 빗겨나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자유로움과 고집스러움이라는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들이 꼭 들어맞는 얼굴. 무심하되 경쾌한 인상. 그를 수소문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더라? 태연자약한 낯짝이 보기 거북할 만큼 익숙했다. 그녀가 찾던 남자였다. 젠셴.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질하던 장궁을 그루터기에 툭 기대어 내려놓았다. 비린내가 날 것처럼 비뚤어진 미소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젠셴의 입가에 떠올랐다.

“이런 데까지 오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네.”쿠레나이는 그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발아래에서 사박사박 나뭇잎이 짓밟히는 소리가 났고 눈빛은 서늘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 지도 퍽 오래되었다. 삼 년이나 지났으면 이 불쾌감도 사그라들까 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재수 없고 예의 없고 경우도 없는 개자식. 그녀가 형형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를 눈치챘음에도 젠셴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입꼬리만 슬쩍 올릴 뿐이었다. 알은체도 하지 않고. 그래서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어김없이 쿠레나이의 몫이 되었다.“너, 나 기억 안 나?”그 질문이 젠셴보다 그녀에게 더 먼저 유효타를 남겼다.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 그녀는 당연히 저 괘씸한 남자에게 쿠레나이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맞은편의 남자는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그에게 과거의 추억을 요구하는 것이 멍청한 일이라는 듯이. 샛노란 눈동자에 수많은 얼굴이 스치는 동안 단 하나도 자기는 낚아채 본 적이 없던 것처럼.“흐음, 글쎄다……. 나 좋다고 애먼 데까지 쫓아오는 사람이 한둘이었어야 말이지.”
“내가 너 같은 거 좋다고 뒤꽁무니 따라다닐 만큼 헤픈 사람인 줄 알아?”
“나야 모르지?”

장궁병 길드 시절이 정말 기억나지 않으냐고 물으려던 쿠레나이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뻔뻔한 태도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하나 남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가 변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금 남았던 예의마저 이딴 식으로 집어치웠을 줄 알았다면 무기를 먼저 꺼냈을 테다. 쿠레나이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으름장을 놓았다.“같잖은 짓 하지 말고 똑바로 예의 갖춰. 네가 기억하든 못하든, 내가 네 선배인 게 변하진 않아.”구겨진 그녀의 미간을 보고도 젠셴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는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여유 넘치는 얼굴로 다시 씩 웃었다. 젠셴의 얼굴 위로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탓에 그의 미소는 더 불쾌하게 보였다.“선배? 그런 플레이를 했던가? 이상하네, 그쪽이랑 그런 적이 있으면 기억이 날 텐데. 얼굴이야 귀엽지만 뭐…….”그의 눈이 쿠레나이를 아래위로 슬쩍 훑었다. 그가 어물쩍 넘긴 말이 무엇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쿠레나이는 그가 확실히 그녀를 알아보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그녀가 싫어하던 것들을 골라 하며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고 있었다. 쿠레나이는 삼단봉을 꺼내 놈을 바짝 겨누었다.“호오. 완드?”
“내가 뭘 할지 알고 여유를 부려? 망할 새끼가.”
“뭘 할 건데? 보여줘 봐.”후회하게 해 주마. 짓씹듯 내뱉은 그녀가 곧장 삼단봉을 내리치듯 크게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땅을 파고들자, 거대한 촉수들이 흙바닥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젠셴에게 쇄도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속이 뒤집힌 그녀의 지시에 맞춰 촉수들이 그의 사지를 얽어매 허공에 띄웠다. 끈적한 점액이 온몸에 무겁게 달라붙고 이계의 존재가 숨통을 옥죄었다.

“큭… 뭐야, 매니악하잖아? 촉수플은 아직 안 해 봤는데.”
“안 닥쳐?”
사지가 묶여 호흡조차 버거워하면서도 그는 이 모든 게 다 장난이기라도 한 듯 조롱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쿠레나이는 저 거슬리는 입을 먼저 틀어막기로 했다. 거대한 촉수 하나가 그의 입을 억지로 비틀어 열고 목구멍까지 처박혔다. 점액이 몸을 타고 흐르자 그의 몸이 한 차례 바르르 떨었다. 그녀가 완드를 노란 눈동자에 바투 겨누고 씹어 뱉듯 말했다.“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길 셈이라면 마음대로 해. 기억난다고 할 때까지 그 목구멍에 처박아 줄 테니까.”그러나 젠셴은 여전히 그녀의 기대와 다른 일을 했다. 그의 눈은 두려움이나 굴종 대신 알 수 없는 장난기와 야릇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정말로 미친 짓을 했다. 촉수 아래로 붉은 혀를 내밀더니 혀끝으로 긁듯 핥아 올린 것이다.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즐기려 드는 꼴이 같잖다 못해, 그녀는 의욕이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이런 놈을 뭐 하러 찾아다녔지. 머릿속에 있던 계획 비슷한 것들이 모두 무너지는 허탈함과, 오만한 태도를 다시 관전하느라 쌓인 짜증, 그리고 짙은 패배감이 차례로 그녀에게 왔다. 그녀는 팔을 축 늘어뜨리고 완드를 까딱였다. 젠셴을 허공에 속박했던 촉수들이 땅 속으로 파고들듯 되돌아갔다. 남자의 몸통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컥……!”코와 입으로 들어찬 흙과 모래를 뱉어내며 잔기침을 하는 젠셴을 내려다보다가, 쿠레나이는 완드를 도로 집어넣었다. 이런 변태 새끼를 두고 진지하게 승리욕을 불태운 자신이 바보 같았다. 삼 년 전에 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잠적한 건 그녀 본인인데도, 그걸 잊고 되돌아왔으니 자업자득이었다. 노을빛까지 살라먹은 숲이 검게 무너지고 있었다.“됐어, 관둘래. 갑자기 길드를 나갔다길래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싶어서 찾아다닌 건데, 지금 보니까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고.”갈래. 힘없이 선언한 쿠레나이는 왔던 길로 다시 발을 들였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목표도 라이벌도 다른 데에서 새로 찾을 수 있을 테다. 그리고…….“뭐야, 잠깐만.”

이대로 그냥 간다고? 젠셴이 다급하게 그녀의 등 뒤에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쿠레나이는 못 들은 체했다. 발치에 버섯 같은 게 밟혀 문드러진 곤죽이 보였다. 그녀는 잠깐 시선을 내려 보았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기다려!”젠셴이 다시 말했다. 그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러나 그가 몸을 일으켜 따라잡는 게 더 빨랐다. 쿠레나이의 앞을 막아선 그는 옷이 점액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어차피 그림자 속이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도망치기에 실패한 그녀의 새빨간 눈이 어둠 속의 남자를 노려보았다.“또 뭐야?”
“왜 더 안 싸워? 더 안 할 거야? 왜?”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재미없다고 했잖아. 날 알지도 모른다는 새끼가 왜 붙잡는 거야? 귀찮게 굴지 말고 썩 꺼져, 너 같은 예의 없는 사람 질색이니까.”이 상황이 정말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쿠레나이는 자기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보이는 젠셴의 얼굴을 보았다.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당황과 혼란, 그리고 불안감이 읽혔다. 그에게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 어쩐지 버림받기 직전의 어린애 같은 표정이라고 그녀가 생각한 순간 그가 토해내듯 소리쳤다.

“선배가 먼저 떠났잖아!”
“뭐?”
절정에 이른 석양이 나뭇잎 틈으로 갈라져 젠셴의 얼굴을, 눈가와 살짝 붉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더듬더듬 실토했다. 내가 왜 길드를 나갔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면서.“선배가 길드를 탈퇴한 이후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어.”
“뭘 또 내 탓을 하려는 거야? 정신 못 차렸지, 너.”
“아니, 들어 봐, 좀.”
선배가 신경 쓰였다고. 그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선배가 가르쳐 주고 바락바락 잔소리해 대는 게 재밌었는데…….”
“그런 자식이 계속 기어올라?”
“그게……!”
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삼켰다.“몰라. 그게 더 즐거웠다고. 선배가 짜증 내고 화낼 때마다 날 똑바로 봐 주는 게 좋았단 말이야. 그런데 선배가 먼저 나가 버렸잖아.”

더듬거리며 이어지던 말이 종국에는 아예 끊겨버렸다. 뒷말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젠셴의 목소리에 담긴, 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의 동요를 어렴풋이 느꼈다. 그가 왜 쿠레나이의 등을 보는 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구는지, 왜 길드를 떠난 자신을 원망하듯 말하는지 그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당황스러움이 거짓이 아님을 감지할 뿐이었다. 얼굴에 머무르는 붉은 시선을 느낀 젠셴이 뒷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민망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과거의 그녀를 잠식했던 모욕적인 열등감과 알 수 없는 불안이 불현듯 겹쳐서 머리 위를 맴돌았다. 어딘지 모를 기시감은 죄책감과 책임감 사이에서 들끓고 있었다. 쿠레나이는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흐려지는 걸 느꼈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뜨고 싶다고 느꼈다.
“야.”
“응?”
“할 말 끝났으면 비키지?”
가지 마. 젠셴이 곧장 대답했다. 그녀를 잡아두고 할 일도, 꺼낼 말도 없다는 걸 둘 다 잘 알고 있음에도. 뱃속에 무언가가 날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내린 결정이 곧장 뒤집혔다. 무엇 하나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젠셴을 이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설령 버리고 떠난다 한들 그가 다시 쫓아오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 또한 뒤를 이었다.

“그럼 그 추접한 행색이나 어떻게 하고 앞을 막든가. 더러워서 보기 싫어.”쿠레나이가 쏘아붙이며 팔짱을 끼었다. 젠셴은 그제야 자기 옷을 내려다보고는 허, 하고 한숨처럼 웃었다.그는 이 숲을 한동안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듯했다. 쿠레나이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몇 번이나 흘끔거리며 확인하면서 젠셴은 그녀를 강가로 이끌었다. 잠깐씩 비추던 석양빛도 이내 사라져서 완연한 어둠이 내리는데도 그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눅눅한 셔츠가 자꾸 늘어져서 그는 옷을 쥐어짜 보려고도 시도했다. 그러나 점액이 겨우 그런 알량한 손짓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이거 벗고 있을까,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가 한 대 맞을 뻔하고 얌전히 옷을 몸에 얹었다.
개울가에 도착했을 땐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손이 닿을 것처럼 크고 가까운 달밤이었다. 보라색보다 남색에 가깝게 빛나는 머리통 위로 달빛을 흠뻑 맞으면서 그가 상의 단추를 풀어냈다. 쿠레나이는 멀뚱히 서 있다가, 근처에서 편평한 바위를 찾아내 그 위로 엉덩이를 내렸다.
“거기서 보고 있으려고?”
“네가 가지 말라며!”
“끈적한 시선으로 보고 있어 달라고는 안 했는데?”
닥치고 씻든가 나 돌아가는 거 보든가 하나만 해. 쿠레나이가 으름장을 놓았다. 젠셴이 곧장 입을 닥치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목구멍에 촉수를 쑤셔 넣었던 탓에 얼굴도 목도 온통 점액투성이였다. 그는 달빛에 흉터투성이인 몸을 이리저리 비춰 가며 몸을 씻었다. 흐르는 물에 입을 헹구고 얼굴을 북북 문지르다가 목덜미와 가슴팍에 물을 끼얹었다. 손가락 끝에 말캉하게 붙어 나오던 점액이 물줄기에 흘러내려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과거에 선술집에서나 가끔 봤던 화보에서처럼 포즈를 취했다. 쿠레나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젠셴은 씩 웃어 보이곤 마저 흙먼지를 닦아냈다.
그가 이번엔 정말로 조용히 있었으므로, 쿠레나이는 그의 근육이 붙은 몸과 나름 근사한 얼굴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집중한 그의 얼굴에선 우수 어린 눈빛마저 느껴지곤 했다. 이름 모를 갈망을 느낄 때면 뜨겁던 시선을 쿠레나이는 이미 알았다. 활을 쏘는 것도 제법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젠셴이 어떤 집단에 소속될 때마다 정착하지 못하는 데엔 그녀도 모르는 어떤 깊은 사정이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어쩐지 등을 돌리고 마저 씻던 그가 고분고분해진 어투로 말을 붙여 왔다. 쿠레나이는 그 말을 무시하려다가, 젠셴이 드물게 먼저 예의를 갖췄다는 점을 정상 참작하여 대꾸해 주기로 했다.“뭐.”
“…왜 나갔어?”
어딜 말하는 거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후배를 짓누르기 위해 발악해 보려고 나갔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쿠레나이는 진심을 가장 산뜻한 버전으로 순화해서 뱉었다.

“더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뿐이야.”
“그래서 마법사가 된 건가…….”
그가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그녀는 머리를 동여맨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젠셴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렸다.“밤이네.”
“선배 머물 곳은 있어?”
“바보도 아니고, 당연한 거 아냐? 마을에 들어오면서 숙박할 곳은 알아봐 둬야지.”
그러자 젠셴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하던 쿠레나이가 하나 남은 눈을 가늘게 떴다.“망할 돼지. 바보 녀석.”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노숙에 익숙해서 그런 거니까. 군인이나 용병이나…….”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그래서 이번에 상대를 이끌고 걷는 것은 쿠레나이의 몫이 되었다. 숲을 오래도록 걸어서 되돌아 나온 그들은 쿠레나이가 선금을 지불한 여관으로 밤늦게 기어들어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야심한 시각에 작은 여관에서 빈 방을 찾기란 쿠레나이의 젠셴에 대한 과거 기억 속 정중한 모습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젠셴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오게 되었다. 그를 걷어찰 기세로 노려보는 쿠레나이에게 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여기까지 데려와서 복도에서 재울 셈은 아니지 선배? 이 가련한 후배를 내쫓지 않을 거지? 의뢰 때문에 나가면 같이 며칠씩 노숙하면서 붙어 자기도 했는데 그치? 쿠레나이는 왜 젠셴이 닥치지 않는가를 고심하면서도 그를 내보내지 않고 두었다.

침대는 두 사람이 눕기엔 몹시 좁았으나, 젠셴은 기어코 그녀의 옆에 눕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변명은 여러 가지였다. 여관에서 따뜻하게 씻은 선배와 달리 밖에서 찬물로 씻느라 감기에 걸릴 것 같으니 체온을 나눠 달라든가, 바닥에 깔 만한 이부자리가 하나도 없다든가 — 노숙에 익숙하다는 자식이 왜 맨바닥에서 못 잔다는 거야! 쿠레나이가 윽박을 질렀으나 소용없었다 — 떠드는 그가 조금 귀찮았던 까닭에 쿠레나이는 벽 쪽으로 몸을 좀 더 가까이 붙였다. 자리가 나자 그가 냉큼 끼어들었다. 바싹 구워 숨이 죽은 아스파라거스처럼 끼어 누운 채 천장을 보고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자?”
“아니. 선배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 자고 있을 리가 없잖아…….”
투덜거리던 그녀가 이불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너… 내일은 어쩔 셈이야.”
“선배가 가는 대로 따라갈 건데.”
“…그럼 내 짐꾼이라도 하든가. 가끔, 아니 사실 자주 싹수없게 구는 밥맛 변태 자식이지만, 그래도 내가 가르쳤었으니까 다른 놈들보다야 네가 나랑 합이 잘 맞겠지…….”
나 끼워 주는 거야? 몸을 뒤집어 그녀 쪽으로 모로 누운 젠셴이, 몇 초 전에 자기가 따라다닐 거라고 선언한 사람치곤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몸을 하도 뒤척이는 통에, 그의 어깨에 거의 얻어맞을 뻔한 그녀가 눈을 흘겼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무르기 없기다, 선배?”
“내가 너인 줄 알아, 멋대로 말을 바꾸게?!”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젠셴은 씩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노란 눈빛이 쏟아져서 눈이 부셨다. 쿠레나이는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희미하게 젠셴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장궁병 길드를 이끌고 있던 먼 과거의 일을. 아마 젠셴도 같은 시간대의 같은 풍경을 보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희미한 안개 같았고 슬며시 겹쳐진 팔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따스했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녀는 길드의 훈련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때의 쿠레나이는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의뢰를 쳐내고 후배들을 키워 내다가 젠셴을 만났다. 오만한 녀석, 태도는 불량하고 툭하면 길드원을 꼬시려고 하거나 규율이 귀찮다고 멋대로 이탈하던 자식. 그가 거울 너머로 쿠레나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무심한 표정이 쿠레나이는 정말 아니꼬웠다. 평가하는 듯한 시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가만히 멈춰 서서 관망하고 있는 그의 세계로는 갈 수 없다는 듯한…….
표적의 정중앙을 꿰뚫은 화살과, 다시 그 살을 가르고 박혀 들어간 다른 화살을 노려보던 때가 있었다. 찢긴 화살은 쿠레나이가 시범차 쏘았던 놈이었다. 보란 듯이 이걸 찢어발긴 녀석을 쿠레나이는 불러다가 엄하게 문책했다. 그가 하는 짓들이 하극상의 전조라고 느낀 길드원들 사이에서 잡음이 발생하는 통에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젠셴은 그 정도로 태도를 고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를 들었고 젠셴은 기꺼이 맞았다. 물론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지는 일과와 감정, 뒤따르는 분노. 하지만 그 밑으로 더 파고들면 그의 완벽한 활 솜씨에 대한 경탄과 질투가 있었다. 어쩌면 젠셴이 그녀와 함께 있는 한 이 지지부진한 상황은 유지되리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그가 쿠레나이의 짜증과 분노를 일종의 유희 취급하는 것도, 그래서 모르는 체 그녀를 매번 도발한다는 사실도 그녀는 알았다. 그녀가 한 번쯤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젠셴은 그런 생각을 할 때 노란 눈을 여느 맹수 못지않게 번뜩이면서 마스터를 노려보곤 했다. 나무로 지어진 길드 건물의 습한 냄새를 들이쉬면서 그녀는 숨을 골랐다. 눈을 돌리고 싶어서였다.
그때부터 도망치는 데엔 도가 텄을는지도 모른다. 젠셴으로부터.
맨 처음에, 그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보기 전에 먼저 발을 뺐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녀는 그럴 성정이 못 됐다. 그래서 남은 선택지가 이것뿐이었다. 그녀에겐 존중이 필요했고 젠셴은 그걸 줄 수 없었다. 결심을 굳힌 쿠레나이는 젠셴이 들여다보던 거울을 눈에 담아 보았다. 햇살이 창문으로 가득 들어와 거울을 비추고 있어서인지 그가 서 있었던 때와 다른 거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날의 일을 꿈으로 곱씹고서야 쿠레나이는 젠셴의 얼굴에 그때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음을 생각해 냈다. 잠깐 그가 아니었던 듯한, 흐려지는 듯한 이미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이 앞에 선 그가 불안하고 외로웠겠다고 짐작했다. 이 앞에 서서도 그림자가 드리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어서 대신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잠에서 깬 그녀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잠들어 있는 젠셴을 바라보았다. 치열한 삶 따위 필요 없다는 듯한 오만한 초연함이 가시자 그의 얼굴은 멀끔하고 근사해 보였다. 쿠레나이는 눈을 찌를 듯한 그의 앞머리를 새끼손가락 끝으로 슬며시 정리했다. 그리고 그를 침대 안쪽으로 조금 잡아당겨 보려다가, 그가 너무 무거워서 실패하고 도로 눕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모로 누운 젠셴을 마주 보고 눕자 아주 약간의 공간이 더 남았다. 쿠레나이는 이불속으로 그 좁은 공간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이불이 걷힌 게 추웠는지 젠셴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뭐야.”힘을 쓰지 않아도 될 뻔했다. 그의 팔에 단단히 갇힌 채 쿠레나이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몸을 밀착하고 있어서인지 심장 뛰는 소리가 아까보다도 훨씬 크게 들렸다. 이번에는 그 소리가 누구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쿠레나이는 젠셴을 마구 째려봐 주고는 꼼질거리며 자세를 고쳤다. 그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해서 영문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곧 다시 쏟아지는 잠이 쿠레나이를 덮쳤을 때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희미한 달빛이 둘의 머리맡을 비추고 있었다.